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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달고 우승한 최초의 마라토너
오래 전부터 마라톤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큰 감동을 안겨준 스포츠다. 1936년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우승은 일제 치하에 있던 국민들의 한을 달래줬으며, 이후에도 많은 마라톤 선수들이 마라톤을 통해 기쁨을 줬다. 광복 이후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국제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이가 있다. 바로 함기용(경영51)교우다. 함 교우는 1950년 열린 제54회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다. 올림픽을 제외하고 가장 오래된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거둔 함기용 교우. 대한육상경기연맹 고문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마라톤계의 기라성 같은 후배를 길러낸 함 교우를 8월 24일 잠실 올림픽경기장에서 만났다.
Q 광복 이후 1950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하셨습니다. 당시 국제 대회에서 금·은·동메달을 모두 대한민국 선수가 모두 석권하자 전 세계가 놀랐습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우승한 것은 처음이었었습니다. 우리나라 스포츠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죠. 이전에 손기정 선수 등 많은 선배가 올림픽에서 우승하기도 했지만, 일제 강점기 때라 일장기를 달고 뛸 수밖에 없었죠.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우승한 것은 제가 처음이었어요.
무엇보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 1위부터 3위까지 다 대한민국 선수가 차지하니 전 세계가 놀랐습니다. 전 세계 언론이 인터뷰를 요청하며 물었어요. 잘 뛰는 비결을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동차가 없으니 걷고 뛰는 게 일상이라 하체가 강하다. 우리를 이기고 싶으면 자동차를 보내 달라. 국가 원조를 해줘서 우리나라도 부자 나라가 되게 해달라” 이렇게 말했어요. 당시 한국은 미군들이 주는 음식 얻어먹으며 지냈던 시절이고 부모님들도 짚신 신고 지내던 시절이니 어린 마음에도 국가가 힘이 없다는 걸 느꼈나봐요. 김치, 고추장, 된장, 김치가 우승의 비결이라고 말하기도 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애국심이 컸던 거죠.
Q 당시 마라톤 연습은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했던 손기정 선배와 3위를 차지했던 남승룡 선배, 1932년 LA올림픽에서 각각 6위와 9위를 석권했던 김은배, 권태하 선배에게 마라톤을 배웠어요. 한국의 기라성 같은 네 명의 선배들은 광복 후 바로 ‘조선마라톤보급회’를 결성했습니다. 붓글씨로 적은 조선마라톤보급회 상판을 손기정 선수가 살던 돈암동 한옥 앞에 붙였지요. 손기정 선수의 집이 바로 조선마라톤보급회이자 마라톤 선수들의 합숙소였습니다. 선배들은 문창호지로 방명록을 만들어서 돈을 모금하러 돌아다녔고, 손기정씨의 부인은 선수들의 밥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선배들의 도움과 가르침 속에 훈련했습니다.
당시 도로에 전차가 다닐 때니까 돈암동에서 창경원을 지나 중앙청까지 달리곤 했어요. 운동장 훈련은 고려대학교의 큰 운동장에서 했죠. 개운사 뒤로 좁은 토끼길을 지나 운동장까지 뛰어가는 것이 하루 일과였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 마라톤의 발동이 걸린 거죠. 선배들의 헌신은 제가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우승하다니 우리나라 전 체육사상 처음이에요. 손기정 선수도 우승하고, 많은 선배들이 이전부터 세계 마라톤 계에서 빛을 보기 시작했지만 가슴에 일장기와 성조기가 아닌 태극기만 유일하게 달고 우승한 것은 저와 손길윤 선수, 최윤칠 선수였습니다. 손기정 선수가 코치로 함께 방문했던 미국 보스턴에서 대한민국 선수가 모든 메달을 차지한 것은 다시 떠올려 봐도 뭉클한 기억입니다.
Q 귀국하자마자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전쟁 중에는 고려대학교에 상학과 51학번으로 재학하셨는데요.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고 미국과 일본의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교포들에게 환대를 받았어요. 그렇게 우승 기념행사에 참석하다 3주 정도 늦게 귀국했죠. 귀국 후에도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만나느라 고향인 강원도 춘천에 갈 틈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6월에 바로 전쟁이 났어요. 결국 고향에 계신 부모님도 뵙지 못하고 대구로 피난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1950년 당시 대구에 임시교사로 존재하던 고려대학교에서 생활했습니다. 대구에 내려가자마자 먹고는 살아야하고 하니까 조선 식산은행(현 산업은행)에 취직했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고려대 상학과(현 경영학과)에 입학했어요.
주경야독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오전에는 은행에서 업무를 보고 오후에는 학교 다니면서 지냈어요. 수업에 출석하지 못한 과목은 밤새 책을 보면서 공부했습니다. 당시 김순식 교수님과 김효록 교수님께 배웠던 생각이 나네요.
당시에는 교과서도 없었을 당시라 교수님 말씀을 필기하고, 필기를 교과서 삼아 공부했어요.교수님들은 일본 책을 번역해 학생들을 가르치셨고, 학생들은 그걸 받아쓰면서 공부하고 그랬습니다. 한 번은 은행일 보느라 부기(簿記)수업에 빠졌었는데, 그 과목을 가르치셨던 김순식 교수께서 “수업을 안 들어오면 학생이 아니다”라고 하시며 혼내셨던 기억도 나네요. 다시 생각해보니 교수님들과 동기들 덕분에 정말 즐거웠던 대학시절이었습니다.
Q 육상경기연맹에 계시면서 황영조 선수, 이봉수 선수 등 한국의 마라톤 국기대표를 길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한국 마라톤은 침체기를 겪고 있는데요.
1952년 마라톤에 출전하기 위해 연습하다 부상을 당한 뒤로 마라톤 선수의 꿈을 접어야했어요. 부상으로 맞은 통증주사가 반대편 다리를 마비시켜 움직이질 못했어요. 그러다보니 다리에 근육이 빠져 더 이상 선수로서의 생활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렇게 선수의 길을 포기하고 은행원으로 정년까지 보냈습니다. 은행에 다니면서는 마라톤을 신경 쓸 수가 없었죠. 육상경기 한 번 제대로 못 볼 정도로 바쁘게 지냈거든요.
퇴직 후에 대한육상경기연맹에서 도와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은퇴 후 국제육상경기연맹의 박정기 집행이사와 함께 마라톤 선수를 육성했습니다. 12년간 대한육상경기연맹에 있을 당시 황영조 선수가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승했고, 이봉주 선수가 1996년 제26회 애틀랜타 올림픽 준우승을 할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좋은 마라톤 선수들이 많이 발굴되던 시절이라 정말 기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 마라톤계가 침체기입니다. 세계 굴지의 대회에서 한국 마라톤이 위상을 떨쳤을 당시에는 많은 기업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훌륭한 지도자와 선수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현재 한국 마라톤의 명운이 교차되고 있지만 흥망의 사이클이 10년 주기로 돌아온다고 하니 많은 선수가 애국심을 갖고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 좋은 성과를 내리라 생각합니다.
Q 마지막으로 모교의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흔히들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합니다. 마라톤 선수가 달릴 때 만나는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처럼 인생도 언제나 굴곡이 함께합니다. 저 또한 인생의 굴곡이 많았어요. 마라톤 대회 우승의 기쁨도 잠시 6.25 전쟁을 겪었고, 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부상 때문에 선수의 길을 포기했던 힘든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또 건재하고 건강하게 노년을 보내고 있듯, 인생은 언제나 새롭게 흘러갑니다. 생각대로만 흘러가지 않을 때가 많아요. 그러나 저는 저에게 주어진 기회만큼은 언제나 최선을 다했습니다. 마라톤 선수로 지낼 때는 죽기 살기로 훈련에 임했고, 은행원으로서는 성실히 정년까지 일했습니다.
어떤 분야든 좋은 결과를 얻고 싶으면 그만큼 많은 연습량을 소화해야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머리로 요령부리며 달려서는 절대 좋은 마라톤 선수가 될 수 없듯, 발로 뛰고 땀 흘리는 선수처럼 살아야합니다.
타고난 천재는 없습니다. 노력만이 천재를 만드는 것이죠. 후배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룰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