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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행권 교수 추모사 (신만수교수)

2006.04.22 Views 3302 정혜림

신만수 교수 추모사


 
김행권 교수님과의 첫 만남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1975년이었다.

고대 무역학과 입학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보러 왔는데 면접관으로 나오신 분이 당시 학과장이던 김행권 교수님이었다. 
 
그렇게 면접을 보고 입학하여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수업이 또한 김행권 교수님 수업이었다. 그랬기에 교수님의 첫인상부터 수업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김 교수님은 수업전 항시 철저히 준비를 하셨기에 강의는 늘 알차고 재미있었다. ‘무역영어’와 ‘무역실무’ 등의 과목을 담당하셨는데 수업 중에 항시 실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셔서 학생들로 하여금 호응도가 높았고 이러한 호응은 학생들의 취업률로 이어졌다. 졸업 후 종합무역상사를 비롯해 삼성물산 등 대규모 무역회사에 취업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교수님과의 두 번째 추억은 1980년 유학을 결심하고 교수님께 추천서를 받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계엄령이 선포되어 학교로는 갈 수 없어 교수님 댁으로 갔다. 교수님은 나의 결심을 들으신 후 관련 서류들을 찬찬히 살펴보셨다. 그리고 곧바로 타이프로 친 추천서를 그 자리에서 만들어 주시며 내게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교수님의 추천서와 격려는 나의 길었던 유학생활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미국 일리노이에서 유학 중이던 1986년에는 퇴직을 준비하시던 교수님이 내가 있는 곳으로 여행 차 오셔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교수님의 평소 성격은 굉장히 낙천적이셨다. 늘 즐겁게 사셨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셨다. 은퇴 후 언젠가 교수님께 장수하시는 비결을 묻자 낙천적으로 하루하루를 그저 열심히 사는 것이라며 빙긋이 웃으셨다.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더없이 따뜻한 분이 김행권 교수님이셨다면 학자로서의 교수님은 그 누구보다 시대를 앞선 분이셨다. 교수님이 활동하셨던 70, 80년대는 한국 무역이 곧 한국의 경제성장의 척도였다. 그러기에 무역을 이해하고 관리할 수 있는 전문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다. 김행선 교수님은 그 전문가를 양성하는 역할을 담당하셨고 한국 경제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육성하신 분이시다. 당시 김 교수님이 저술하신 무역영어와 무역실무에 관한 서적은 그 분야에 있어 교과서라고 불렸을 정도이며 최고의 베스트셀러이기도 했다.
교수님이 그 책들을 저술할 때는 팩스나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일일이 기업체를 방문하여 기업이 실제로 사용하는 영문레터와 영문서류 등을 수집하셔서 책에 담으셨다. 당시 졸업 후 무역회사에 취업한 동창들의 말에 따르면 김행권 교수님의 수업 덕분에 취업 후 실무에 적응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교수님은 일찍이 영어교육과 국제사회에서의 영어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요즈음 흔히 말하는 글로벌 인재의 개념은 30년 전 김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역영어를 비롯한 영어교육에 뜨거운 열정을 보이셨는데 이는 수업시간 뿐 아니라 학생들과의 클럽활동으로도 이어졌다. 
 김 교수님은 경영대학내 영어클럽인 ECS(English Conversation Society)의 1기 지도교수를 역임하셨다. 교수님의 열정이 담긴 창간호는 현재 수당학술정보관에 보관중이다.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에서 부터 클럽을 이끌어 나가는 것 까지 학생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클럽의 모든 작업을 함께 하셨다.

  늘 학생들과 함께하며 후학의 발전을 위해 힘쓰셨던 교수님이셨던 김행권 교수님. 이제 같은 길을 가고 있는 후배로서 학문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너무나 닮고 싶은 스승이자 대 선배로 기억될 것이다. <고려대학교 신만수 교수/경영신문 장혜란 기자  대담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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