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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3위의 국민소득과 ‘세계 45위’의 기부 수준. 다른 나라에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된 대한민국이지만 정작 국내의 기부 문화, 나눔 문화는 뿌리 내리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기부에 대한 낯선 인식 속에서도 고려대학교, 특히 경영대학은 활발한 ‘펀드 레이징(Fund Raising)’을 해오고 있다.
경영대는 현대자동차경영관(이하 현차관)과 LG-POSCO경영관 등 교육시설 건립을 위해 한시적으로 특별 태스크포스팀(이하 모금팀)을 운영했다. <경영신문>은 대외협력부 박정배 모금기획과장과 현차관 모금팀의 일원이었던 경영대학 경력개발센터 옥비나 실장을 만나‘펀드 레이징’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모금과정은 크게 4가지 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이른바 ‘4R’이다. Research(잠재적 기부자 탐색 및 조사)-Romance(잠재적 기부자와의 관계 형성)-Request(기부 요청)-Recognition(기부자 예우)의 순서다. 이 프로세스를 바탕으로 옥비나 실장과 함께 현차관 건설기금 모금과정을 돌아봤다.
대개의 건축기금 모금과정은 경마대회와 비슷하다. 목표 모금액과 모금기간은 경마대회의 결승선이다. 금액과 기간의 숫자들은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지상과제다. 다른 가치는 끼어들기 힘들다. 모금팀은 경주마다. 눈가리개를 뒤집어 쓴 경주마가 한 곳만 바라보고 질주하듯, 모금팀은 최대한 빠른 시일에 많은 기금을 모으는 데만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경영대학의 현차관 건설기금 모금과정은 이와 달랐다. 물론 목표로 삼은 숫자들은 있었지만 ‘사람''을 제일 높이 위치 시켰다. “우리는 기간 내에 목표 금액을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금액과 기간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새로운 경영대 건물의 건립에 참여하는가가 더 중요했습니다.”이렇게 경영대는 기획단계에서부터 교우들의 이야기를 벽돌 삼아 현차관을 쌓아 올리기로 했다.
#Research
Research 단계는 모금의 취지에 공감하는 기부자를 찾는 과정이다. 모금팀은 ‘고경인의 이야기가 담긴 신(新) 경영관’이라는 취지에 맞게 경영대 학부생, 졸업생, 경영전문대학원 졸업생들에게 프로젝트를 알리기로 했다. 학장과 부학장 등 운영팀은 연말 동기회 행사에 대부분 참여해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홍보물과 소책자도 배포했다. 아직 동기회가 단단하지 않은 학번은 학교로 초청했다.
교우들에게 기부의 목적을 설명하는 편지와 e-메일을 보내기 위해선 주소록이 필요했다. 이 때 교우회와 동기회가 적극나섰다. “각 동기회마다 중심축을 맡아 주시는 분이 꼭 있었어요. ‘걱정 마세요, 제가 다 모아볼게요’하시곤 본인의 시간을 들여 주소를 모아주셨죠” 모금팀은 교우들의 도움으로 예비 기부자들의 연락망을 확보할 수 있었다. 탄탄한 교우회는 경영대의 훌륭한 자산이었다.
#Romance
모금가와 기부자가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인 Romance 기간은 기부문화가 정착했다는 미국도 보통 1년 반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현차관 모금에서 로맨스 기간은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교우들에겐 고려대학교와 함께한 지난 세월이 오롯이 로맨스였다. 경영대 교수도 힘을 보탰다. ‘씨드 머니(Seed Money)’로 불리는 교수들의 기부금은 현차관의 ‘제자사랑 라운지’로 피어났다. 경영대 직원들도 모두 기부에 동참했다. 학부 재학생, 대학원생, 교우, 교수, 직원 등 모든 경영대학 구성원이 합심했다.
옥 실장은 모금기간동안 가장 크게 느낀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교우들의 모교 사랑’과 ‘고경인의 패밀리 의식’이라고 답했다. “경영대는 이미 기부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LG-POSCO경영관엔 대학 최초로 기부자의 이름으로 불리는 강의실에 있습니다. 심지어 의자 하나하나에도 기부자 이름이 붙어있지요. 이를 보고 공부한 경영대 학생들은 선배들의 사랑을 기억하고, 받은 것을 후배들에게 돌려줍니다.” 모교와 후배들을 위한 ‘내리사랑’의 기부문화. 모금팀이 전통으로 이어가려 했던 역점과제였다.
#Request
기부 선진국에선 기부요청을 받은 개인은 이를 큰 영광으로 여긴다고 한다. 경영대 교우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부를 요청받은교우들은 대부분 흔쾌히 참여 의사를 밝혔다. 지인에게 함께 하기를 권하기도 했다. 교우들이 기부를 약정하면 모금팀은 ‘어떻게 기부를 하게 됐는지’, ‘현차관 건립기금 기부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정리했다. 옥 실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기부자로 퇴직금을 기부했던 교우를 꼽았다. “퇴직금은 기부자 혼자만의 돈이 아니잖아요. 교우님과 가족의 뜻깊은 기부에 감사 드리고자 가족 모두를 학교에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모금팀은 기부의 순번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벤트도 진행했다. 이를 위해 ''실시간''으로 기부자의 명단을 관리했다. 고려대학교의 설립연도인 1905번째 기부자, 현차관의 건립연도인 2013번째 기부자 등에게 고대 와인과 감사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오로지 최종목표 달성에만 매달렸다면 실천에 옮기기 힘든 기획이었다. 감동적인 기부 스토리는 <경영신문>을 통해 매주 구성원에게 알렸다. 또 본교의 기금 전담부처인 대외협력부와 협업을 하면서 약정서를 못 받은 기부자는 없는지, 소득공제를 받지 못한 기부자는 없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Recognition
모금팀은 기부자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모자와 티셔츠, 큐브를 전달했다. 감사품 선정과 제작과정을 꼼꼼하게 따졌다. “기부자들이 평소에도 경영대에 기부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도록 하고 싶었어요. 모자는 장식용이 아니라 평소에도 착용할 수 있도록 만들기로 했습니다. 설문조사를 통해 크림슨 색과 블루계통의 색, 두 가지를 마련했죠.” 큐브를 만들 땐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다. 큐브 내부에 호상의 이미지를 넣기로 했는데 국내에선 제작할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해외에서 만들어 들여오는 데 성공했다. 기부자의 이름이 들어가기 때문에 혹시 실수가 있진 않았을까 챙기고 또 챙겼다.
본교의 모금 업무를 총괄하는 대외협력부는 고액을 기부 받을 경우 기부자의 이름과 금액을 고대신문 등의 미디어를 통해 공개한다. 하지만 애초부터 현차관 건립기금 모금은 금액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영대는 고액 기부자일지라도 기부 금액을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본부 측에 요청했다. 고액 기부자들도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경영대는 기부 금액과 관계없이 모든 참여자의 이름을 건물에 새겼다. “공동 학번대의 기부는 기부에 참여한 분의 성함을 모두 새겼어요. 다양한 예우 프로그램을 추진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기부가 잊혀 지지 않았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현차관이 라운지, 학부 강의실, 대학원 강의실, 극장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춘만큼, 기부자의 이름을 시설에 네이밍 할 때도 본인의 의사를 세심하게 반영했다. “최대한 많은 학생이 이용하는 공간이었으면…”하는 기부자는 라운지에, “학부 학생들이 이용하는 공간이면 좋겠다”고 하는 기부자는 저층 학부 강의실에 이름을 붙였다. 공간을 이용하는 후배들이 선배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경영대는 현차관 준공 후에도 ‘기부자 예우의 밤’ 행사를 마련했다.
옥 실장은 완공된 현차관을 볼 때마다 뿌듯하다. “제 이름도 저기 새겨져 있어요. 경영대학 직원들 역시 소액이나마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부에 동참 했습니다. 이렇게 큰 소속감과 애정이 느껴지는 건물이 세워지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어 기쁩니다.”
‘선배들의 사랑과 이야기가 담긴 현차관’에서 신입생들이 한창 이야기꽃을 피운다. 벽면 곳곳에 새겨진 선배들의 이름이 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선배의 이야기가 몸에 스며든다. 머지않은 날, 이들의 이름도 반갑게 후배를 맞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