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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기 명예교수 | 칼럼] 일본 학자가 본 「德川時代의 日․朝關係」

2018.03.02 Views 2209 경영대학

일본 학자가 본 「德川時代의 日․朝關係」



 
김동기
대한민국학술원 부회장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필자는 작년 10월 22일부터 5일간 일본학사원에서 개최되었던 제89차 「국제학술원연합회」(UAI) 년차 총회에 참가했었다.

총회 기간중 특별프로그램으로 있었던 학술논문 발표일에 한국관련 논문발표가 단1건이 있었는데 일본학사원의 田代和生(Kazui Tashiro) 회원이 발표한 「德川時代의 日․朝關係」 (일어 원문 제목) 논문의 주요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 학자가 쓴 이 논문의 주요내용을 알아보는 것은 도구가와 시대의 양국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해 보려는 것이다.

이 논문은 264년간의 도구가와 시대(1603~1867)에 있었던 조선과 일본간의 외교 및 무역에 대해서 史実에 입각해서 쓴 논문인데 양국간의 외교와 무역이 이루어지도록 중간에서 仲介者 역할을 한 對馬島의 영주 宗氏의 활동내용과 양국간의 외교(조선통신사의 訪日 포함) 및 무역의 주요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도구가와 시대 전기간을 통해(264년간) 12차례에 걸쳐 朝鮮 通信使(400~500명 내외)가 일본을 방문했었는데 첫 번째로 일본에 간 조선 통신사는 무려 504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방문단이었다.
(필자 註 :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260년간 계속된 조선 통신사는 사무라이(武士)들이 主流를 이루었던 당시의 일본 지배계층에 대해 고도의 정신문화의 문물을 전달했던 문화․친선 사절단이었다. 제1기(1607, 1617, 1624, 3회) 선조, 광해군, 인조 시대, 제2기(1636, 1643, 1655, 1682, 1711, 5회) 인조, 효종, 숙종 시대, 제3기(1719, 1748, 1764, 3회) 숙조, 영조 시대, 제4기(1811, 1회) 순조 시대 총 12회 조선 통신사가 12회로 끝난 것은 400~500명 내외의 다수 인원이 장기간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발생하는 엄청난 비용부담 때문에 12회로 끝났다는게 일본측의 설명이었다.)

제2기의 첫해인 1636년에 일본에 왔던 조선 통신사는 총475명으로 문관, 무관, 통역관, 화가, 의사, 곡마단, 童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明나라를 치기위해 조선반도를 거쳐가야겠다는 핑계로 두 번에 걸쳐 조선을 침략했었다(1차 1592~1593, 2차 1597~1598).

일본의 조선침략으로 악화된 양국관계를 우호선린 관계로 전환시키려는 양국간의 강화(講和)교섭을(조선통신사의 일본방문이 실현될 때까지) 실제로 담당했던 主役은 德川時代가 아니고 중세부터 양국간 무역을 독점해온 對馬島의 宗氏였다.

단절되었던 양국간의 관계 修復은 朝·日 양국간의 무역으로 생계를 이어온 대마도 도민에겐 死活문제였다는 것이 田代和生 발표자의 주장이었다.

강화교섭은 대마도 영주 宗義智(1568~1615)를 비롯한 柳川調信과 智永父子 및 外交僧 玄蘇 등이 중심이 되어 1599년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에 支援軍으로 주둔해 있던 明나라 군대가 1600년 철수하게 되어 조선이 일본과의 각종교섭에 明나라가 직접 간섭하는 일이 없어지자 宗氏는 1604년 대마도에 체류중이던 조선사절을 설득하여 京都를 방문토록 해서 德川家康·秀忠(1579-1632)父子와 접견토록 주선해서 成事가 되었다.

德川家康은 조선사절에게 자기는 조선침략에 가담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조선정부와 조선사절의 이해를 구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朝鮮은 통신사를 파견하는 조건으로 德川家康에 의한 사죄의 뜻을 담은 國書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幕府가 이런 요구에 응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宗義智 등은 양국간의 修交를 성공시키기 위해 「德川家康의 國書」를 위조해서 양국간 수교를 실현시키고저 1606년 이 위조된 國書가 조선측에 전달되어 다음해 조선통신사의 일본 파견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두차례에 걸친 조선 침략으로 단절된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를 선린․우호관계로 복원하기 위해 「평화 및 문화사절단으로서의 조선 통신사」를 도구가와 정부가 받아드리기로 했다고 田代和生 논문 발표자는 설명하였다.

양국간의 외교 및 무역은 대마도의 영주 宗氏가 중개자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서 마침내 도구가와 정부로부터 양국간의 무역 독점권을 부여 받았다고 한다.

양국간 무역은 ①封進(조선 국왕에의 조공무역) ②公무역(조선 정부와의 무역) ③私무역(조선의 민간 상인들과의 상거래) 등 3가지 종류였는데 封進과 公무역은 년 1회 私무역은 월 6회 이루어졌다고 田代和生 논문 발표자는 설명하였다. 무역 총액은 公木(조선의 고품질 木綿(솜))으로 결재했는데 어떤 경우엔 조선 쌀(약 1,200톤)로 결재 한 적도 있었다.

양국 무역이 Peak를 이루었던 해엔 銀으로 계산해서 6,000貫目(1貫目=3.75kg)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의 양국간 무역은 막대한 이익이 생기는 私무역 중심으로 이루어 졌는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수출은 최고 품질의 銀貨(순도 80%)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전체무역의 60% 이상).

기타의 對조선 수출품은 구리와 주석 같은 광물, 물소뿔, 후추, 염료 및 담배였고 조선의 對日 수출품은 生絲, 견직물 및 인삼(전체수입의 20%) 등이 었다.
대마도의 宗氏는 조선 인삼을 많이 수입하기 위해 최고품질의 銀貨(순도 80%)를 매년 5톤씩 주조해서 조선으로 수출할 수 있는 허가를 도구가와 정부로부터 받아냈다고 한다.

일본의 대조선 수출의 반이상을 차지했던 銀은 1750년대에 들어와서는 거의 중단되었는데 私무역에서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수입한 주요품목은 牛皮, 黃芩, 소뿔, 소발굽 등이 었다.

1811년 파견된 마지막 조선 통신사는 일본 본토에 가지 못하고 대마도에서 모든 행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도구가와 정부는 막대한 경비 절감을 할 수 있게 되어 그 보답으로 宗氏에게 5년간 2,500兩의 手當金과 2万石의 곡물생산이 가능한 토지를 하사 하였다.

조선 정부도 宗氏를 통해 對日 외교와 무역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조선 통신사의 일본 방문을 성사시켰기 때문에 그와 그의 참모들이 國書(일본 정부의 공식 외교 문서) 위조 등의 잘못이 있었지만 그의 공적이 더 컸기 때문에 그의 잘못을 문제삼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양국 정부 입장에서 보면 豐臣秀吉에 의한 2차에 걸친 조선 침략으로 단절된 양국간의 외교․무역 관계를 조선 통신사와 같은 문화․친선 사절단의 訪日을 허용하면서 재개․강화하는데 중개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대마도의 宗氏의 공로를 양국 정부가 높이 평가했다고 해석 할 수 있을 것이다.
 
※ 田代和生 일본학사원 회원의 일본어 논문을 필자가 요약해서 소개했음을 밝혀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