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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이 흘러도 생생한 워싱턴대에서의 생활 - 유세환, 이준범, 조익순 명예교수 인터뷰

2017.06.19 Views 5142 경영대학

60년이 흘러도 생생한 워싱턴대에서의 생활
 
“벌써 60년이나 지났어?” 경영대학에서 만난 유세환 명예교수는 워싱턴대 사진을 쓰다듬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제가 ‘나의 유학기’를 경영신문에 기고하고 그랬습니다. ” 유 교수는 유학시절을 묻자 웃으며 말했다. 올해는 한국 경영학을 태동시킨 ‘워싱턴대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딱 60년 되는 해다. <경영신문>은 60년 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워싱턴대에서 학업과 연구를 했던 △유세환 명예교수 △이준범 명예교수 △조익순 명예교수(가나다순)를 만났다.
Q 올해는 워싱턴대 프로젝트 계약체결 60주년입니다. 당시의 상황이 궁금합니다.
조익순 교수┃ 당시에 미국 정부와 ICA 프로그램에 따라 원조계약을 체결해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와 경영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한 원조를 받게 되었습니다. 서울대는 미네소타대학과 계약이 됐었지요. 계약 이전에는 미국에 유학을 갔어도 워싱턴대가 아닌 다른 대학으로 갔어요. 워싱턴대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후 제가 처음으로 워싱턴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정수영 선생, 성창환 선생, 그리고 유세환 선생이 오게 됐어요. 그 당시에 워싱턴대에 가기 위해서는 영어강습소에 다닌 후, 시험에 통과 해야 유학을 갈 수 있었습니다.
유세환 교수┃ 미국의 경영학 도입은 엄청난 학문적 충격이었습니다. 미국 교수들이 직접 미국 교재를 사용해 강의를 진행하며 한국 교수를 훈련시키기도 하고, 젊은 교수들은 워싱턴대로 파견연수를 가기도 했죠. 저는 1958년에 워싱턴대로 파견을 갔어요. 당시 전임교수였는데,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워싱턴대로 갔던 것이죠. 
이준범 교수┃저는 한국은행에 근무하다 프로젝트가 거의 끝나갈 무렵 워싱턴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갈 때만 해도 여의도 비행장에서 출발했는데, 미국을 가기 위해서는 일본, 하와이 등 4번 정도 경유를 해야 갈 수 있었어요. 참 열악했죠. 그런데 돌아올 때에는 두번 경유만에 올 수 있었어요. 그만큼 한국의 발전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지요.  
 
Q 워싱턴대에서 어떻게 공부를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조익순 교수┃워싱턴대 프로젝트 체결 후 워싱턴대 석사과정을 처음 등록한 학생이 저였습니다. 원래 1년 간 공부하고 돌아오기로 했는데, 워싱턴대 측에서 계속 공부를 하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하지만 본교 사정 상 1년 뒤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죠. 아쉬웠습니다. 이후에 워싱턴대에서 다시 절 부른게 1963년도예요. 그래서 다시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프로젝트 계약기간이 1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 학위를 따기 위해서는 4과목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엔 4과목 공부가 정말 어려웠어요. 중간시험을 치는데,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이마에 땀이 줄줄 흐르더군요. 
그래서 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오게 됐습니다. 대신 한국에서 논문을 작성하고 싶으니 그 비용을 대달라고 워싱턴대 측에 전했고, 지원을 받을 수 있었어요. 과정은 마치지 못했지만, 당시에 수강했던 과목의 학점은 일부 인정돼 2016년에야 워싱턴대로부터 MBA 학위는 아니지만 MSBA 명예학위를 받았죠.
유세환 교수┃ 저는 58년에 미국에 가 3년 정도 체류하며 회계학을 전공하고 정식 박사과정을 밟았습니다. 연세대 이종화, 임익순 선생과 같이 갔었어요. 다들 같이 교수아파트에서 지냈는데, 수업을 따라가느라 밤을 새다시피 했습니다. 저는 당시에 회계학 전공이었던 뷰캔 박사의 수업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뷰캔 박사는 그 때 학장이었던 트럼프 박사의 은사이자 워싱턴대 프로젝트의 책임자이기도 했는데, 인간적으로 아주 좋은 교수였어요. 
이준범 교수┃저는 연세대의 송자 선생과 동기예요. 저도 유 교수처럼 잠을 자지 못하고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과제가 많기도 했는데, 일단 과제를 하려면 영어 사전을 놓고 단어를 일일이 찾아봤어야 했으니 고생을 좀 많이 했죠.

Q 유학생활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유세환 교수┃워싱턴대 앞에 한 피자 가게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맥주를 엄청 마셨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갔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흰 고무신을 사서 점원에게 선물로주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나중에 다시 가보니 가게 벽에 그 고무신을 걸어놨더군요. 잊지 못할 기억이에요. 
또 뷰캔 박사와의 일화도 있습니다. 박사과정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당시 가난한 유학생이었기에 돈이 없었어요. 그런데 뷰캔 박사가 한 쪽지를 전해주며 대학 매점에 가보라고 했습니다. 매점에 가 확인 해보니 졸업 학위가운을 맡겨 놨더라고요. 제가 졸업가운 살 돈이 없다는 걸 알고 학위가운을 선물해 준 겁니다. 지금까지도 뷰캔박사에게 고마운 마음이 남아있습니다. 
조익순 교수┃저는 한국에서 주판을 가지고 계산을 했었어요. 그런데 워싱턴대에서 치러진 회계원리 중간시험에 주판을 가져가 합계를 놓고 있으니까, 버질교수가 시끄럽다고 핀잔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문제를 못 풀고 그냥 내버렸던 기억이 있어요.
 
Q 워싱턴대 프로젝트 이후 고려대 경영대학뿐만 아니라 국내 경영학계가 많은 변화를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준범 교수┃
워싱턴대 프로젝트 이후 1958년 기업경영연구소가 먼저 설립되고, 그 다음 1963년 경영대학원이 생겼습니다. 학부 학생들에겐 경영학 교육을, 일선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겐 경영대학원에서 1년간 야간 교육을 시켰습니다. 경영대학원 학생들은 기업 사장부터 이사까지 다양했고, 군사반도 따로 있었어요. 또 당시 기업경영연구소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기업 경영 합리화, 생산성 향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환자를 진단하듯 기업의 경영을 진단해주었습니다. 우리나라 웬만한 대기업이나 국영기업들은 기업경영연구소에서 진단을 받았어요. 군대의 지휘체계도 모두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시 기업경영연구소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지요. 우리 고려대와 연세대가 같이 워싱턴대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이렇게 기업진단 프로그램을 만들어 기업경영에 공헌을 하게 된 건 우리가 먼저였죠. 대혁신이었습니다. 
유세환 교수┃워싱턴대 프로젝트를 통해 최고경영자들을 위한 세미나가 한참 유행했어요. 온양온천에서 매년 진행이 되었는데, 제가 강의를 맡았지요. 당시 내로라하는 기업체의 사장, 회장들은 전부 세미나에 와서 배우고 갔다고 봐도 될 겁니다. 이게 효시가 되어 1975년 최고경영자과정이 신설될 수 있었어요.
조익순 교수┃저는 다녀와서 정부 일을 많이 도와줬습니다. 정부회계를 체계적으로 고치는 작업을 했거든요. 제가 워싱턴대 유학 후 진행된 것이니 정부 또한 프로젝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봐도 되겠네요. 
이준범 교수┃더 덧붙이면, 1955년도의 경영학과에서는 상과교육, 즉 장사하는 것만 가르치고 있었는데 워싱턴대 덕분에 체계적인 경영학 교육이 가능해졌습니다. 
또 프로젝트 이후 학교 운영도 크게 달라지게 된 것 같아요. 워싱턴대로 인해 국내 경영학이 크게 발전하면서 경영학과 출신 교수들이 총장, 사무처장 등을 맡기 시작했어요. 경영학과 교수가 학교 운영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되면서 학교도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죠. 

Q 마지막으로 워싱턴대 프로젝트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준범 교수┃현재 경영대학을 평가하면 역시 고려대가 1등입니다. 그리고 워싱턴대 프로젝트는 지금의 경영대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조익순 교수┃기업경영연구소,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 등이 신설되며 고려대가 다른 대학을 현저히 앞서게 됐습니다. 최초로 시작했다는 명예를 얻었어요.
유세환 교수┃프로젝트 이후 경영학 교육의 현대화가 진행됐고, 본교가 1등으로 올라설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