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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에는 다르게 보인다, 코끼리가 트레이딩존에 사는 이유
엄정순 작가, KUBS 81 Trading Zone을 다시 찾다

같은 작품인데, 어제 본 것과 오늘 본 것이 다르다. 지난 3월 KUBS 현대자동차홀 KUBS 81 Trading Zone에 세라믹 조각 '코 없는 코끼리 K'가 설치된 지 여섯 달. 엄정순 작가는 인터뷰 약속보다 일찍 도착했다가 뜻밖의 장면을 목격했다. 오전 11시 무렵, 건물 창을 통해 들어온 직사광선이 조각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다. 한 시간가량 이어진 그 빛과 그림자는 해가 넘어가며 이내 사라졌다. 작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짧은 문장 하나를 남겼다. "11시의 그림자."
"24시간 여기 있는 게 아니니까 작가도 몰랐던 부분이에요. 이 환경이 주는 새로운 장면이잖아요. 오늘 아주 큰 수확이었어요." 미술관이었다면 통제된 조명 아래 절대 볼 수 없었을 우연이다. 그는 이 우연을 "학교라는 환경이라 오히려 자연광이 들어와서 작품을 달리 보이게 하는" 발견이라고 표현했다.
한 작품이 시간에 따라,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이 경험은 사실 엄 작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질문이 다름 아닌 KUBS 81 Trading Zone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단순한 우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코가 사라지자, 비로소 다른 것이 보였다
'코 없는 코끼리'는 코를 스스로 버린 것이 아니라 잃은 존재다. 엄 작가는 이 지점에서 말을 신중히 골랐다. "'잃었다'는 것과 '사라졌다'는 건 조금 달라요. 어딘가 있을 것 같기도 해요. 눈앞에 없는 거지, 존재 자체가 완전히 소멸된 건 아니거든요."
코끼리에게 코는 가장 중요한, 이를테면 권력과도 같은 기관이다. 코가 있을 때 사람들은 코에만 집중하고 다른 부분은 보지 않는다. 그런데 코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비로소 다른 것을 보기 시작했다. "엉덩이가 귀엽다", "다리가 생각보다 얇다"는 반응들이 이어졌다. 하나의 관점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여러 개의 새로운 관점이 들어선 셈이다. "결핍이 무섭고 불안정한 게 아니라, 그동안 못 봤던 것을 보게 하는 시발점이 된다는 게 제 메시지예요."
이는 '11시의 그림자'와 정확히 같은 구조를 갖는다. 같은 대상도 보는 시점, 보는 각도, 보는 사람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것이 드러난다는 것. 그것이 결핍이든 빛의 각도든, 엄 작가에게는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곧 새로운 질문의 출발점이다.
"코가 없어야, 트레이딩존이 산다"
이 코끼리가 놓인 공간의 이름은 KUBS 81 Trading Zone. 호기심(Curiosity), 협업(Collaboration), 기여(Contribution)라는 세 가치를 바탕으로 학생과 기업, 예술가가 자유롭게 만나 문제를 논의하도록 설계된 곳이다. 개관 당시 김언수 학장은 "학생과 기업, 예술가가 자연스럽게 만나고 부딪히는 과정에서 새로운 질문이 나온다"고 이 공간의 취지를 밝힌 바 있다. 경영학과 디자인, 예술이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문제를 마주할 때, 그 차이 자체가 협업의 재료가 된다는 뜻이다.

엄 작가는 이 공간이 자신의 작업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고 봤다. "예술 작품과 무관한 공간은 아마 없을 거예요. 어디에 예술 작품을 놓느냐에 따라 그 공간이 변화하죠. 그런데 대부분은 갤러리나 미술관처럼 예술과 관련된 곳에만 제한돼 있잖아요." 경영대라는 낯선 장소에 아트웍이 들어와 공간의 성격 자체를 바꿔주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미술관에 소장되는 것 이상의 의미라고 그는 말했다.
무엇보다 그를 흥분시키는 건 피드백이다. "미술관에 들어간 작품은 피드백이 잘 안 와요. 학교는 다르죠." 목적 없이 우연히 마주치는 공간이기에 오히려 반응이 계속 쌓인다. 실제로 학생들은 코가 없는 조각을 보며 "왜 코끼리인데 코가 없어요"라고 묻고, 저마다 다른 상상력으로 답을 지어낸다. 디자인조형학부 학생이 이 공간에서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정보들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었다"고 말한 것처럼, 코끼리 앞에서 벌어지는 저마다 다른 해석은 결국 트레이딩존이 지향하는 것과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서로 다른 시야를 가진 사람들이 같은 대상 앞에 모여, 각자 다른 것을 발견하고, 그 다름을 나누는 과정. "연출과 기획 의도는 첫눈에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죠. 그런데 사용자가 적극적으로 공간을 쓰면서 점점 그 의미를 더해주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AI가 대체할 수 없는 것, 서로 다르게 보는 능력
이 관점의 전환은 AI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도 유효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익숙한 방식과 기존의 경쟁력을 스스로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 늘고 있는 지금, 엄 작가는 오히려 담담하다. "AI가 그림을 그려주고 작곡을 해주는 것 자체에 크게 위협을 느끼지는 않아요." 그가 더 주목하는 건 AI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영역, 바로 '근접 감각'이다. "정말 해결하기 어려운 게 근접 감각, 그중에서도 촉각이라고 봐요. 살이 닿는 감각만큼 직접적이고 정확한 게 없거든요."
문제는 우리가 그 감각을, 그리고 다르게 보는 시도 자체를 잘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눈은 어마어마하게 빠르고 분석적이지만, 편견에도 가득 차 있어요." 하나의 정답, 하나의 관점에 익숙해진 시선은 AI가 가장 잘 흉내 내는 영역이기도 하다. 반대로 같은 대상을 시간과 각도, 배경이 다른 시선으로 다시 보는 능력, 그리고 그 차이에서 새로운 질문을 길어 올리는 능력은 여전히 사람의 몫으로 남는다.
"내가 나로 사는 데, 절대 없어서는 안 될 것"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엄 작가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코가 없어도 코끼리인가"라는 이 작품의 물음을, 지금 사회로 나아가는 대학생들에게 던진다면 어떤 질문이 될까.
"내가 나로 사는 데 있어 절대 없어서는 안 될 것, 그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어느 날 어떤 이유로 사라진다면, 나는 그래도 나인가."
코끼리에게 코가 반드시 있어야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코가 없는 상상력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더 새롭게 보인다. 오전 11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그림자가 조각의 얼굴 위로 드리울 때도 마찬가지다. 같은 것을 계속 다르게 볼 수 있는 자리, 그것이 엄정순 작가가 트레이딩존에서 발견한 코끼리의 쓸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