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비친 KU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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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여성소비자신문
 
올해 백수(白壽·99세)를 맞이한 송용순 황해도 중앙도민회 부회장은 치열했던 그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1921년 2월 22일 해주시 북욱정에서 태어났다. 여성의 교육률이 낮던 시절 학구열이 높았던 부모님 덕에 남들보다 일찍 해주초등학교에 입학하며 신여성으로 자라났다. 해주여고를 거친 송 회장은 일본 동경기예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공무원 남편을 만나 결혼해 슬하에 딸과 아들 둘을 두었다. 1980년대 고려대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한 이후 숙명여대 한국생활경제 연구부를 이수했다. 뉴욕주립대 하계대학, 하와이 동서 문화연수원, 일본국립교육연구원과정까지 이수하며 배움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그의 삶은 봉사와 헌신이다. 1965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 중부경찰서 어머니 선도회장을 맡았고, 서울 1970년부터 9년간 서울 종로소방서 부녀회장을 역임했다. 1967년부터 1980년까지 서울 중부직업학교 후원회장을 맡고 1980년부터 2013년까지 33년간 교장을 역임했다. 보수를 받지 않고 야간학교를 운영하며 800여 명의 학생을 졸업시켰다. 송 부회장의 학생들은 수십 년째 스승의 날마다 그를 찾아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다.

여성들을 위한 활동도 왕성히 했다. 송 부회장은 (사)한국부인회 총본부 부회장을 맡았고 실향민중앙회 여성부 회장, 서울시 중구 여성단체 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후 민주평통 중구 여성분과위원회 회장을 맡았으며 서울시여성회회장, (사)한국부인회 서울시지부 회장을 역임했다. 고려대학교 여성교우회 이사를 맡은 후 현재는 고려대학교 여성교우회 고문, 고려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AMP교우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교육과 봉사에 헌신하는 삶을 살고 “괜찮게 산 것 같으니 앞으로 더 모범을 보이고 싶다”며 미소짓는 그를 <여성소비자신문>이 만나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사진=여성소비자신문
-언제나 소녀처럼 웃으시는 모습을 여러 차례 뵈었다. 삶의 철학이나 신념이 있으시다면.
“나는 항상 부지런해야 했고 성격이 긍정적이어야 했어요. 긍정적이지 않으면 자기가 손해거든. 그러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조금 모자란 성격인 거지. 사람만 좋아하니까.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항상 겸손해야 되고 친절해야 되는 거라고 철저히 교육하셨어요. 그러니 저는 부모님 교육, 잔소리가 최고라는 걸 살면서 항상 강조했지요. 학교 교육은 학문이지, 인성까지 교육시키기는 조금 부족하잖아요.
 
우리 어머니가 나를 여섯 살에 유치원에 보내고 일곱 살에 학교를 보냈어요. 구십 몇 년 전이니 그때는 다들 아홉살, 열 살에 학교에 갈 때에요. 학교 교육을 따라가기는 힘들었어도 꼴찌는 안했지요. 열 세 살에 졸업하고 여학교를 갔는데, 그때 우리나라에서 일등으로 꼽는 여학교가 서울에서는 경기, 평양에는 서문고녀, 황해도에는 해주여고가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열 네 살에서 열 일곱, 여덟 살에 들어가는 학교인데, 저는 어린 나이에 학교에 입학했어도 잘 따라가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우리 오빠가 부모님의 속을 썩였어요. 그 모습을 보며 ‘돈 있는 남자에게 시집가지 않겠다’라고 정했어요. 그래서 돈이 없어도 인격 있는 남편을 만나고 행복하게 살았어요. 지금도 우리 남편을 안 만났으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없다, 최고의 행복이었다고 생각하곤 하죠. 부잣집으로 시집을 갔다면 주방장 며느리 밖에 더 되었겠어요? 우리 남편은 사회활동 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으니까 (행복했죠).
 
인격자를 만나 결혼하고 43년 5개월을 살았어요. (남편은) 내게 스트레스를 준 일이 없어요. 내가 못생겼어도 공주같이 모시고 살았죠. 지금 생각해도 나같이 행복했던 여자는 드물다고 생각해요. 남편을 만나 해주여고에서 교사 일을 하고 늘 맞벌이를 했지만 괜찮았죠. 딸 하나 아들 둘을 두었는데, 38선을 넘어와서도 괜찮았어요. 세 들어 쪽방에 살았어도 집주인보다 더 잘 살았지요. 돈은 쓸 만큼만 썼으면 됐지, 더 쓸 것 무어냐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불편한 게 없었어요. 더 부자라고 해서 여자가 행복한건 아니잖아요. 그런 정도로 제가 낙천적이라 돈 못 버는 남편을 만났어도 돈 얘기 해본 적이 없어요. 돈은 내가 다 해결을 하니까. 지금도 모자란 것 없어요. 그러니 우리 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대학생들에게도 늘 돈에 중요점을 두지 말라고 강조하곤 했죠.
 
그러다가 1982년에 딸이 (그해 마흔 세 살이었는데) 어머니가 좋은 일만 많이 하셨지 하나님은 모르지 않냐고 하더군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했어요. (딸로 부터) 전도를 받고 1983년 한 해 동안은 그렇게 즐겁기만 했어요. 그런데 1984년에 남편이 건강진단을 받으니 췌장암이라더군요. 그때부터 암흑세계였어요.
 
수술을 안 했으면 좀 더 살았을 것 같은데, 췌장이 힘든 부위래요. 우리 영감이 69세였는데 수술을 받고 100일 만에 지쳐서 하늘나라로 갔지요. 그 와중에 또 딸이 밤에 아버지한테 문병을 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대로 가버렸어요, 심장이 원래 약한 편이었는데 아버지가 그른 상황에서 심장이 그만 멈춰버린 겁니다. 그야말로 온 천지가 잿빛이었어요. 남편이 돌아가실 때까지 두 달 열흘 동안 딸의 죽음을 남편에게 알리지도 못했어요. 그 시간 동안 혼자 이 사실을 지고 있으려니 죽을 것만 같았죠.
그래도 저는 좀 긍정적인 성격이에요. 어려서부터 누구와 싸움을 해본 적도 없고. 그저 하나님이 보우하사 제가 이렇게 모자라도 만족한 기분으로 살게 해주시는 거지요. 안 그러면 어떻게 그 세월을 살아왔겠어요. 불만없이 사는 저를 지켜본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저 처럼 살고 싶다고 해요.”
 
-송 부회장님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삶도 살고 계신 것으로 안다. 주로 관심을 갖고 계신 분야는.
“다름 사람을 도와주는 삶은 어려서부터 우리 부모님이 하는 것을 봤으니 그게 당연지사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 남을 도와준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늘 나눠가지는 것으로 알고 살았어요. DNA가 어쩔 수 없더군요. 우리 부모님은 당신 쓰는 것을 절약을 해도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은 인색하지 않게 가르치셨어요. 이제도 저는 제가 쓰는 것은 아껴도 남에게 쓰는 것은 아까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사진=여성소비자신문
-앞으로 어떤 인생을 계획하고 계시는가. 우리 여성 인생 후배들에게 전해주시고 싶은 말씀은.
“이제는 앞으로 뭘 하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가 없지요. 이제는 저 세상에 갈 것이 가까우니 그동안 살아온 것처럼 평온하게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으로 살고 싶죠. 제가 잘살지는 않아도 다들 저를 부러워 하니까. 남처럼 부자로 호강을 하며 산 것도 아닌데 다들 저처럼 살고 싶다고 하니 그게 제가 잘 살았다는 거겠죠? 괜찮게 산 것 같으니 앞으로 더 모범을 보여야겠다는 생각 밖에는 없어요.
 
저는 훌륭한 젊은이들을 만나는 게 정말 기뻐요. 젊은이들 속에서 살고 있어요. 나는 80년대에 야간학교를 운영했는데 대학생들이 와서 봉사를 하잖아요. 교장이라고 으스대고 그러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 젊은 대학생들이 나를 좋아할 정도로 소녀처럼 놀곤 했어요. 오래 살았어도 하나님이 다 보살펴주셨으니 이렇게 살았죠. 저는 오늘 날까지 늘 사랑받고 살았다는 생각에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지안 기자  hann9239@wsobi.com
[출처] - 여성소비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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